번역 소스 : https://bunshun.jp/articles/-/6215
번역 : 네메가

 

영화가 사랑한 “셰이프 오브 크리에이터”의 이야기

“‘사랑과 영화’를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었다.”

 

2017월 11월, 도쿄 국제 영화제에서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상영 전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영상 편지로 남긴 말이다.

 

이미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룬 본작은 그 명예에 걸맞은, 델 토로 성분 120%가 함유된 걸작이었다.

 

“델 토로라는 장르”

더불어 골든글로브상에서도 최다 7개 부문에 후보작으로 선정되었고 감독상과 작곡상을 받아 2관왕에 올랐다. 크리틱스 초이스 영화상에서는 14개 부문의 후보작으로 선정되어 최다 후보작에 올랐고 작품상, 감독상 등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이미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 후보에 오르거나 수상을 이룬 상황이다.

 

이렇다 보니 이 작품이 제90회 아카데미상에서 13개 부문 후보작으로 선정되어 최다 후보작에 오른 것도 이해가 간다. 아카데미상 수상의 영광에 가장 가까운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는 “사랑과 영화”를 사랑하지 마지않는 크리에이터, 기예르모 델 토로의 모든 것이 담기다 못해 흘러넘치고 있었다.

 

서스펜스, 바이올런스, 에로티시즘, 유머, 기쁨과 슬픔까지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요소는 물론, 마니악하며 오타쿠들이 좋아할 만한 소재들이 널려있는데다 귀엽기까지 한 작품이다. 또 인종, 성별, 마이너리티 등 현대적이며 사회성 있는 테마를 이야기한다. 특정 장르로 옭아맬 수 없는 유니크한 작품이다.

 

영화는 서두에 “a Guillermo del Toro Film”이라는 자막을 내보낸다. 이것이야말로 델 토로만이 만들 수 있는 “델 토로 장르” 영화라는 증거이다.

 

“인싸”가 아닌 여주인공

델 토로 작품의 계보로 따져보자. ‘악마의 등뼈’, ‘판의 미로’와 비슷한 부류의 테마를 이야기하는 최신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테마뿐 아니라, 이 세 작품은 델 토로 감독의 다른 작품과 달리 감독 자신이 제작(프로듀스), 기획, 원작, 각본, 감독을 맡았다. 감독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있는, 그야말로 ‘a Guillermo del Toro Film’ 계보에 속하는 작품이 틀림없다.

 

작품은 1960년대 초, 동서 냉전 시대의 미국 정부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일라이저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녀는 알람 시계 소리에 일어나 식사와 목욕을 마친 후 광낸 구두를 신고 출근길에 오른다. 출근 체크를 기다리는 줄에서는 동료가 그녀의 자리까지 미리 맡아놓고 있다. 영화는 서두에서 일라이저의 이러한 일상을 반복해 그리며 마치 그녀가 현실의 일상 속에서 다른 무언가를 꿈꾸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웃 화가와 계단 밑 영화관(그녀가 사는 아파트 1층이 영화관이다)의 지배인, 동료인 젤다와의 교류,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는 오래된 영화, 극장에 걸린 영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그녀는 일상을 즐기고는 있지만 만족하고 있지는 않다. 흔히 말하는 “인싸”도 아니다. 불행하진 않지만 언제나 일상 저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찾아 꿈을 꾸는 소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라이저는 ‘판의 미로’의 소녀와 동류인 것이다. 영화는 몇 분 채 되지 않는 오프닝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이해시키고, 우리는 일라이저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만다. 우리도 그녀처럼 일상에 만족하지 못해 영화에서 꿈을 찾는 일라이저이기 때문이다.

 

무척 영리한 오프닝이 아닐 수 없다.

 

“밤의 주민”이란?

일라이저는 농아이다. 백인(WASP)이 주역인 연구소에서 야간 근무 청소원으로 일하고 있다. 동료인 젤다는 흑인 여성이며 이웃 화가는 회사에서 잘린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짐작했듯이 일라이저와 그녀의 지인들은 당시 미국 사회에서 약자이자 마이너리티에 속한다.

 

신체적 결손, 인종과 성별, 직종과 빈부격차처럼 사회적 지위 등에 있어 열등한 것으로 취급받는 “밤의 주민”인 것이다.

 

델 토로의 영화에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으며 “꿈”을 필요로 하는 마이너리티들이 등장한다. 일라이저가 보던 오래된 영화나 ‘판의 미로’에 나오는 소녀 오필리아를 저항할 여지도 없이 매료시킨 요정의 세계처럼 필요한 것은 동화 속 “꿈”이다. 그것은 델 토로 스스로가 어릴 적 필요로 했음이 틀림없는 “꿈”과 동일할 것이다. 멕시코에서 태어나 자라 당시 “오타쿠”라는 마이너리티였던 그는 어릴 적부터 영화와 괴수, 몬스터 같은 이형의 존재에 끌렸고, 도움을 받아왔다. 영화인이 되어 해외로 활약의 장소를 옮겨서도 멕시코인이라 차별받았다. 그런 그 자신이 일라이저이자 오필리아인 것이다.

 

때문에 델 토로는 그녀들을 비참하고 불쌍한 인물로 그리지 않는다.

 

반대로 연구소의 주역이자 냉전 시대의 가상 적대국 소련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명예로운 역할을 맡은 백인이 상사(국가)의 무리한 요구에 응하다 못해 과도한 스트레스를 껴안고 사는 불쌍한 “낮의 주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덧붙여 일라이저의 일과에는 욕조에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행위도 포함되는데, 연구소를 지휘하는 대령은 아내를 상대로 마치 스트레스를 발산하는 양 섹스를 벌인다).

 

어느 날, 연구소에 남미에서 포획된 반어인이 반송되어 들어온다. 미국 입장에서 본다면 머나먼 촌구석에서 인간이 아닌 생물이 잡혀 온 것이다. 즉 이 반어인 또한 일라이저와 그 주변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마이너리티에 속하는 “밤의 주민”이다.

 

일라이저와 반어인은 모두 백인사회라는 메이저리티의 관점에서 “이방인”인 셈이다.

 

동화와 “냉전”, 그리고 몬스터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항상 무언가를 기다리던 일라이저는 “백설 공주”이자 “잠자는 숲속의 공주”이며, “신데렐라”의 후예라 할 수 있겠다(하지만 고전 동화의 엔딩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이 후술할 본작의 굉장한 점이다).

 

그렇기에 둘은 서로 점차 가까워지며 친교를 쌓고 사랑에 빠진다.

 

여기에 반어인의 특수한 신체적 특징을 냉전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미국과 소련의 음모가 얽힌다.

 

우화적이며 에로티시즘에서 그로테스크까지 거리낄 것 하나 없이 어른의 판타지를 이야기하며 동시에 동서 냉전의 모략이라는 정치적이고 서스펜스로 가득한 액션을 그린다. 작가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지니며 나아가 과거 괴수 영화를 향한 애정을 듬뿍 첨가한 엔터테인먼트 작품이다. 그야말로 독보적인 델 토로의 전문 분야이다.

 

영화 구석구석 델 토로의 손길이 모두 닿아있다. 이것은 작금의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영화라는 생물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에 델 토로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작가성을 발휘하기 힘든 할리우드 시장

감독은 물론 제작, 원안, 각본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목소리 출연은 당연하거니와 캐스팅까지 그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일라이저 역 캐스팅은 델 토로가 샐리 호킨스와 만나 “한눈에 반했다”며 결정했다고 한다). 작품의 스타트 지점인 강의 상류(아이디어 및 구상)부터 관객에게 전달되는 하류(포스터와 비주얼을 포함한 프로모션)까지 모든 곳에 그의 손길이 닿았다.

 

그렇기에 본 작품을 보고만 있어도 델 토로라는 크리에이터의 작가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할리우드와 같은 거대 영화 산업 세계에서 델 토로처럼 행동하고 작품의 모든 것에 관여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위대한 선인 존 카펜터, 제임스 카메론 등은 작품의 기획부터 각본, 디자인, 캐스팅, 촬영, 편집, 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면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만이 만들 수 있는 “카펜터 장르”, “카메론 장르” 영화를 만들어냈다(카메론이 영화 경력을 특수 효과 스태프로 시작했듯이 델 토로도 특수 분장 스태프로 영화 경력을 시작한 점은 우연의 일치라곤 하나 무척 흥미로운 부분이다).

 

인디계에는 니콜라스 빈딩 레픈, 닐 블룸캠프처럼 작가성과 엔터테인먼트를 겸비한 데다 델 토로와 같은 생각과 자세를 갖고 활약하는 크리에이터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익 추구가 첫 번째 목표인 할리우드에서는 그들 같은 크리에이터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 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게임 업계도 다를 것 없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정부 연구소와 마찬가지로 업계를 지배하는 것은 메이저리티, 즉 낮의 세계의 이론이기 때문이다.

 

분업 제작에 발명은 없다

초대작 블록버스터(게임이라면 AAA급 대작) 제작에 있어 리스크를 회피하며 확실하게 성공시키기 위해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바로 경제성과 효율성이다.

 

이러한 마케팅이 주도하는 공장의 라인과도 같은 제작 공정에서, 독창성 있는 창작물과 제작자의 색과 형태(셰이프)가 묻어나는 작가성은 방해가 될 뿐이다.

 

감독이라는 작품을 이끄는(디렉션하는) 크리에이터는 많은 스태프를 지휘하는 “지휘관”(직업 감독)의 역할이 요구된다.

 

오늘날 할리우드 대작에서는 음악과 컨셉 아트 같은 독창성이 필요한 작업도 비슷한 구조로 돌아간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위해 여러 스태프와 팀이 분업 형태를 이룬다. 예시로 이전 같으면 ‘에일리언’에서 H.R 기거가 에일리언을 디자인하는 모든 과정에 참여하여 역사에 남을 크리처를 창조해냈으나, 이 또한 과거의 이야기이다. 작곡도 버나드 허먼이나 존 윌리엄스처럼 제작에 관여하는 방식이 아니라 여럿으로 이루어진 팀이 악곡 제작을 “담당”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작품 전체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부분만 “담당”하는 것이 작금의 영화 제작 현장인 것이다.

 

이것은 많은 인원을 들여 거대한 공업 제품을 제작하는 것과 흡사하다. 규격에 맞는 나사와 톱니바퀴를 정해진 대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며 삼각형, 사각형 톱니바퀴를 만드는 창의성은 요구되지 않는다.

 

제대로 움직이는 제품을 만들 순 있으나 새로운 것, 아무도 본 적 없는 것, 즉 발명이라 부를 만한 것이 나오는 환경은 아니다.


게임 업계에 “감독”은 존재하는가?

이러한 경향은 할리우드보다 게임 업계가 더 현저하다 볼 수 있다. 이미 AAA 작품은 분업 제작 체제가 확립되어 카메론이나 델 토로처럼 기획부터 모든 것을 지시하며 제작에 관여하는 “감독”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아니, 수요조차 없다. 여기에 현재 게임 업계가 빠진 함정이 있다. 분업(라인) 생산과 디지털 제작은 잘 어울리며 효율적이다. 그렇기에 “감독”은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 제작 현장처럼 “지휘관”의 역할만이 요구된다. 기획, 원안, 제작, 각본, 음악부터 프로모션까지 관여하는 “감독”은 들어가는 시간과 코스트 때문에 효율이 좋지 않다. 기업에도 무익할 따름이다.

 

얼핏 정론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큰 오해가 있다.

 

또한 다른 측면에서 현상을 바라볼 경우 디지털을 통해 효율적으로 제작된 작품에는 작가성이 깃들 수 없으며(단순한 상품), 아날로그로 손수 제작한 작품에만 작가성이 깃든다(창작물)는 오해로도 이어진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모두 도구(수단)인 점에는 변함이 없으며,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단순한 복제품이나 유사품과 진정 새로운 발명품을 가르는 차이가 말이다.

 

내가 “A HIDEO KOJIMA GAME”을 남기는 이유

영화와 게임 모두 유저가 일생의 일정 시간을 소모하는 엔터테인먼트이다. 여기에는 “사랑”이 필수불가결하다. 하나의 영혼이 깃든 인간이 얼굴도 모르는 무수한 관객에게 작품을 통해 “사랑”을 전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작품의 모든 곳에 제작자의 혼을 담아야 한다.

 

델 토로가 “‘사랑과 영화’를 사랑하지 마지않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었다”며 본작 서두에 “a Guillermo del Toro Film”라고 건 것은 전혀 자기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작품에 담은 “사랑”과 “영혼”이 누구의 것인지 선언코자 하는 사인인 것이다. 스태프 롤을 잘 관찰해 보자. 델 토로의 이름이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 여기에는 작품에 대한 자부와 책임, 흘러넘치는 “사랑”이 담겨있다.

 

내가 자신이 만든 작품 서두에 “A HIDEO KOJIMA GAME”라고 적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사랑과 게임’을 사랑하지 마지않는” 유저에게 코지마 히데오라는 인간이 자신의 전부를 쏟아부은 “사랑”과 책임을 담아낸 게임을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할리우드는 인디 업계로부터 재능있는 신인 감독을 스카우트해 “공장 라인 조장”에 임명하는 만큼, 작금의 게임 업계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상황인지도 모른다.

 

아트(작가성)와 엔터테인먼트(상업성)는 꼭 분리해야 하는가?

이 연재에서 반복해서 짚었듯이, 마블이나 ‘스타워즈’와 같은 “유니버스” 장르에 전력으로 기용된 여러 감독 중 많은 이들이 본래 가진 자신만의 작가성을 발휘하지 못한 채 “지휘관”으로 능력을 소비해왔다.

 

마치 남미라는 “밤의 세계”에서 “낮의 세계”로 끌려온 반어인처럼 말이다.

 

그들은 독창적인 꿈(작품)을 꾸던 밤의 주민이다. 할리우드는 그 재능을 평가해 데려온 것이 아니던가(덧붙여 ‘셰이프 오브 워터’의 반어인은 남미에서 신으로 숭배받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낮의 이론으로 그들이 가진 재능을 짓밟아버리기도 한다.

 

세계에는 낮과 밤만이 존재하는가?

 

아트(작가성)과 엔터테인먼트(상업), 메이저와 인디뿐인가?

 

델 토로를 포함한 그와 같은 자질을 가진 한 줌의 크리에이터들은 낮과 밤의 세계를, 메이저와 인디의 세계를 쓰디쓴 경험을 하며 걸어왔다. 그가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걸어왔는지 알고 싶다면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라.

 

미야자키 하야오가 없는 스튜디오 지브리는 과연 “지브리”라 부를 수 있는가?

델 토로는 카메론에 의해 재조명된 ‘크로노스’(감독, 각본, 멕시코 영화)부터 첫 미국 자본으로 제작된 ‘미믹’(감독, 각본, 미국 영화)과 ‘악마의 등뼈’(감독, 각본, 제작, 스페인 영화)를 거치며 캐리어를 쌓고 평단의 평가를 받은 후 ‘블레이드2’의 감독으로 기용되며 할리우드 메이저로 진출했다.

 

이후 ‘헬보이’를 거쳐 제작, 감독, 각본을 직접 맡은 멕시코, 스페인, 미국 합작 영화 ‘판의 미로’를 제작한다. 수 년 후에는 레전더리 픽쳐스 제작의 ‘퍼시픽 림’의 제작, 감독, 각본을 맡았다. 인디와 메이저를 왕래하면서도 자신의 작가성, 창조성을 포기하지 않고 작품 제작을 계속해왔다.

 

얼마 전에는 러브 크래프트의 ‘광기의 산맥’ 기획이 중지되고 ‘호빗’, ‘퍼시픽 림2’의 감독 강판, 필자와 함께 참여한 게임 ‘P.T.’의 제작 중지 등 뼈아픈 좌절을 여럿 겪기도 했다. 하지만 ‘셰이프 오브 워터’의 성공은 이를 극복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확실히 현재 할리우드는 일관된 작가성을 유지하기란 힘겨운 환경이리라. 하지만 넷플릭스나 디즈니 훌루, 아마존 비디오 등의 대두,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으로 시청 환경이 변화해가는 등 유저에게 작품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은 급변하고 있다. 영상뿐 아니라 게임 또한 크리에이터가 유저에게 직접 게임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것은 한 줄기 희망이자 광명이기는 하나, 모든 크리에이터와 작품의 구세주가 되진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환경은 환경일 따름이며 도구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메이저든 인디든 창작의 기적은 크리에이터에게 깃드는 법이다.

 

카메론의 손이 닿지 않은 ‘터미네이터’는 “터미네이터”였는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없는 스튜디오 지브리는 “지브리”라 부를 수 있는가.

 

낮의 이론이 작동하는 시스템만으로는 진정한 “작품”이 탄생할 수 없다. 또 밤의 이론만으로 작품을 만드는 크리에이터는 마지막까지 빛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이방인”이다.

길예르모 델 토로는 어떻게 낮과 밤을 왕래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밖엔 설명할 길이 없다. 베네치아에서 받은 황금사자상을 포함해 다수의 수상작 후보와 수상작으로 선정된 사실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 동시에 영화와 게임처럼 창작에 매료된 크리에이터들의 희망이나 다름없다.

 

델 토로는 지금까지 피 말리는 경험을 통해 낮과 밤이 가지는 각각의 이점과 약점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그렇기에 얻을 수 있었던 영광이다. 하지만 그는 눈부신 낮의 세계로 떠나버린 것이 아니다. 밤의 세계에서 빛을 받아 상품과 제품이 아닌, 창작물이라는 풍요로운 세계를 많은 이에게 형태로 만들어 보여주었다.

 

반어인과 농인 여성의 이야기는 창작(크리에이트)의 이야기, 즉 “셰이프 오브 크리에이터”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밤의 세계에 살던 델 토로가 낮의 세계로 떠나 성공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마이너리티가 실은 낮의 세계에 사는 엘리트였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사실은 백조였던 ‘미운 오리 새끼’, 실은 왕자였던 ‘미녀와 야수’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실은 〇〇였답니다”같은 동화다운 결착을 부정해 보인 영화는 지금껏 ‘슈렉’ 외엔 본 적이 없었으나, 여기서 아예 한술 더 뜨는 것이 본작이다.

 

인간인 왕자를 사랑한 인어가 자신의 목소리를 대가로 다리를 얻는 ‘인어공주’와는 달리 일라이저는 처음부터 목소리를 갖지 않았고 반어인은 원래부터 반어인이다. 그들은 미운 오리 새끼의 모습(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야수의 모습 그대로 목소리를 갖지 않은 채 서로를 사랑한다.

 

이것이야말로 델 토로가 그리는 “사랑의 형태”인 것이다.

 

델 토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한편, “다르고” “이방인”인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자들과 거리를 두는 것 또한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중략) 다시 말해, 우리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방인”인 것이죠.”(‘길예르모 델 토로의 셰이프 오브 워터 / 혼돈의 시대에 전하는 동화’ 서문 발췌)

 

이 작품은 영화가 사랑한 크리에이터가 “사랑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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